안중근의사의 의거직후 당시 최강대국 영국의 데일리 미러 신문기사..참고로 그당시 영일동맹관계로..일본에 우호적기사이나..안중근의사의 의거가 국제사회에 남긴 충격이 어느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안중근의사인들 당신의 행동으로 당장 일본을 막아설수 없다는것을 모르지 않앗을것이다.. 허나 그냥 순순히 나라를 내줫다면.. 오키나와처럼 다시일본에 수용됫을 가능성도 충분햇을것이다...하지만 목숨을 던지며 끝까지 저항햇지만 당장에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김을 조선.일본.중국은 물론 서구열강에까지 강하게 각인시킴으로 후일을 기약할수 있었고..안중근의사의 정신을 이어 강우규.이봉창.운봉길 의사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원동력이 됨으로. 꾸준히 항일운동이 지속되엇고 그결과 국제사회가 카이로 회담에서 최초로 전후에 한국 독립을 약속 하게 된다...후에 원폭한방에 일본이 항복함에 한국독립은 미국에 의해 된거라 주장하기도 하나..국제사회가 결코 가만히 있는데..한국가의 독립을 보장하는 곳이 아니다..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이 지속적으로 일본에 무력공격등을 해왓던 노력으로 카이로회담 통한 한국독립은 보장받앗던것이다..물론 중간에 얄타회담과 모스크바 3상회담등으로 환경이 좀 변하긴 햇으나... 위와 같은 대한민국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주고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감히..안의사의 남겨진 글씨들보다..더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생각한다 1면에 안의사가 저격한 이토의 가족사진과 하얼삔역 당시 모습등 지면 전체를 할애햇으며 하단에 한국인이 이토를 저격햇다고.기재..이후 본격 내용은 뒷년 지면에 자세히 기사를 수록... 1027** 참고로 역사적으로 일본이 영국. 프랑스등의 숙적인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인시점부터 유럽국가들은 태평양전쟁(이차대전)이 발발할때까진 일본에 우호적이어서 한국에는 관심이 없엇다..기사들의 논조도 친일성향으로 작성하고 비중도 높지 않앗으나 이토의 사망은 원체 충격기사이다 보니 대서특필을 안할수가 없엇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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